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누일 1세 (문단 편집) === 동방 원정 === ||[[파일:1123e15e06ba68829360ff39cf4ebd7d--byzantine-empire.jpg]]|| ||안티오키아에서 개선하는 마누일 1세와 황제의 말구종 노릇을 하는 르노 공작|| [[르노 드 샤티용]]은 날치기 결혼을 통한 자신의 [[안티오키아 공국]]의 공작위 획득을 명목상의 상위 군주인 황제가 용인해 주는 대가로 제국령 킬리키아에 있는 [[도로스 2세]]의 아르메니아계 반란군을 응징하고 자금을 지원받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 막장 공작은 돈을 받지 못하자 약속을 지키지 않음은 물론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를 욕보여서 뜯어낸 돈을 밑천삼아 제국령 키프로스를 침공해 약탈하고 유린했다(1156년). 그렇지 않아도 르노를 맘에 들지 않아 하던[* [[르노 드 샤티용]] 항목 참조. 결혼 반대자 중엔 마누일도 있었다.] 마누일은 이 어처구니 없는 행위에 격분하여 직접 군대를 이끌고 레반트로 친정했다(1158년 겨울). 4만 ~ 5만에 달하는 동로마군은 아르메니아인들을 손쉽게 쳐부수고 차례차례 [[킬리키아]]의 모든 도시를 다시 제국의 수중으로 가져왔다. 황제는 응징의 의미로 일부러 병사들을 통제하지 않고 풀어놓았으며, 동로마군의 약탈에 의해 안티오키아 주변은 초토화 되었다. 막강한 동로마 해군도 바다를 휩쓸고 안티오키아로 향하는 항로를 모두 차단했다. 궁지에 몰린 르노는 신민들과 다른 십자군 국가들에게 함께 저항하자고 설득했으나, 주민들은 '원주인이 돌아오나보다' 정도의 반응을 보였고 다른 십자군 국가들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키프로스 공격도 내부 반대를 억눌러가며 저지른 패악질의 연속이었고, [[예루살렘 왕국]]의 [[보두앵 3세]]는 황제의 질녀 테오도라 콤니니와 결혼하는 등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추구하고 있었다. 결국 르노는 저항을 포기하고 굴욕적인 항복 의식을 치르게 되었다. 1159년 4월, 마누일은 성대하게 안티오키아에 입성했다. 안티오키아는 제국의 봉신국이 되었으며, 교회 역시 정교회 산하로 편입되었다. 또한 황제는 인척이 된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3세]]와 함께 마상 시합을 여는 등 우호 관계를 다졌으며 십자군 국가들의 종주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보두앵 3세로서는 주변의 위협인 [[장기 왕조]]를 동맹인 제국의 힘을 빌어 공격하고 싶어했으나, 누르 앗 딘은 재빠르게 사절을 보내 강화를 제안했다. 마누일은 이를 수용했고, 보두앵 3세와 예루살렘의 십자군 군주들은 불만스러워했으나 제국이 안전을 보장했으므로 결국 납득했다. 황제는 원정 결과에 만족하여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했다. 이후 르노가 무슬림들에게 포로로 잡히자(1160년), 그 지위가 위태로워진 [[콩스탕스]]는 후원자가 필요해졌다. 마침 황후 슐츠바흐의 베르타가 죽어(1159년) 홀아비가 된 마누일은 십자군 지역에 영향력을 더 굳히기 위해 십자군 국가 사이에서 새 신붓감을 물색했는데, 예루살렘 왕국 측에서는 [[트리폴리 백국]]의 백작 레몽 3세의 누이이자 보두앵 3세의 사촌인 멜리장드를 밀어주었다. 동로마 황실과 예루살렘 왕실을 더욱 가깝게 엮는 한편, 안티오키아 공국과 동로마 제국이 지나치게 가까워 지는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안티오키아 측에서는 마리아의 계부인 르노를 도의적으로 도우기 위해서나 콩스탕스의 지위를 위해서나 황제의 후원이 절실했으므로 더 적극적이었고, 이에 황제는 마리아를 황후로 택했다. 그녀가 [[알렉시오스 2세]]의 모후가 되는 [[안티오키아의 마리아]]이다. 이렇게 1150년대 후반 동로마 제국의 동방 원정은 성공적으로 끝나 [[레반트]] 지역에서 제국의 영향력은 확고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